Battle of Orgreave ©

© Jeremy Deller

주한영국문화원은 한국인 최초로 테이트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이숙경 박사의 영국문화계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장소 특정형 신작을 만들 수 있도록 작가들을 지원하는 아트엔젤 

오늘날 영국 미술계의 큰 그림을 형성하는 여러 작은 조각들은 미술관, 공공 갤러리, 상업 갤러리, 기금 후원 기관, 스튜디오 프로그램, 아트 페어 등 다양하다. 이들은 작품과 관람객을 연결하는 복잡하면서도 폭넓게 연결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작가들은 안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고 관람객은 양질의 미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한다. 시대에 따라 각 중계자(agency)들의 역할과 중요성은 변화하고, 때로는 새로운 성격의 중계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트엔젤(Artangel)은 이런 중계자들 중에서도 지난 20여년 간 그 활동 범주와 역할을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영국 미술계의 큰 그림까지 바꾼 경우이다. 

아트엔젤은 영국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중견•신진 작가들에게 장소 특정적인 신작(site-specific new commission)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한다. 물리적인 공간을 바탕으로 한 미술관이나 갤러리, 후원금 제공 위주로 운영되는 기금 등과는 대조적으로, 아트엔젤은 작가 선정 및 뉴 커미션의 아이디어 단계부터 작품이 들어설 공간과의 협상, 법•행정적 절차, 예산 마련 및 운용, 작품 제작 및 디스플레이까지 다양한 단계에 걸쳐 작가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기획자, 후원자, 큐레이터, 행정가 등 여러 역할을 수행하는 이 기관을 영국 미술계에서는 ‘보모(babysitter)’이라는 애정 어린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공미술'에서 '공적 영역의 미술'로의 개념 확대에 공헌한 아트엔젤

1985년 설립된 아트엔젤은, 1991년 당시 현대미술학회(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의 전시 큐레이터와 공연예술 디렉터로 각기 활동하던 제임스 링우드(James Lingwood)와 마이클 모리스(Michael Morris)를 공동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철거를 앞둔 전형적인 서민층의 주택 내부를 콘크리트로 채운 후 집의 실제 구조를 없애고 내부의 윤곽만 남겨 시적이면서도 강렬한 조각 작품으로 만든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집(House)>(1993), 이제는 매튜 바니(Matthew Barney)의 대표작이 된 <크리매스터 사이클(The Cremaster Cycle)>의 첫 장편 영화 <크리매스터 4>(1995) 등은 링우드와 모리스의 예술적 방향과 야심찬 기획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아트엔젤의 프로젝트들은 주로 일상적인 공간에서 실현되어 왔고, 이런 아트엔젤의 영향력과 혁신성은 전통적인 공공미술 분야에서 특히 돋보였다. 영국을 비롯한 영어 사용권 국가들의 미술계가 최근 몇 년 간 ‘공공미술(public art)’라는 용어 대신 ‘공적 영역의 미술(art in the public real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예술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상당한 이념적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점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승전 기념비, 개선문, 영웅들의 동상에 이르기까지 공공미술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서면서 미술이 도시 계획과 건축물 마스터 플랜의 일부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세계 각지의 대도시들이 유명 미술가들의 야외 조각 작품을 관광명소처럼 자랑하고, 영향력 있는 기업들의 본사 주변에 미술 작품이 들어서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울만큼 흔한 일이다. 

미술의 많은 분야가 그렇듯이, 공공미술에 대한 동시대 미술의 접근은 상식적이고 관례적인 이해에 대한 의문과 도전으로 특징지어진다. 일종의 정치 선전이나 장식물로 미술 작품이 이용되는 데에 저항하며, 일상의 공간이 어떻게 미술과 접목될 수 있는지를 되묻는 작품들이 등장한 것은 이런 태도의 변화와 연계된 현상이다. 많은 작가들은 이제 삶의 터전으로서의 공적 영역을 재고찰하고 장소성이 내재하는 지역 공동체의 문제에 주목하며, 결과로서의 물리적 작품보다는 과정과 참여를 작품의 중심에 두곤 한다. 아트엔젤 프로젝트들은 특별히 공공미술이라는 분야에 한정되지 않지만, 다수의 프로젝트가 템즈 강, 공원, 사무실, 쇼핑몰, 거리 같은 일상적인 공적 영역에서 전개되면서, 이 분야에 대한 토론과 논쟁에 중요한 동기를 제공해 온 것이 사실이다.

아트엔젤이 지원한 다양한 작품들

공적 영역이라는 개념 자체를 물리적인 공간으로부터 전자적이고 가상적인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킨 예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영국 작가 리처드 빌링엄(Richard Billingham)의 <어항(Fishtank)>(1998), 캐나다 작가 자네트 카디프(Janet Cardiff)의 <부재하는 목소리(케이스 스터디 B)(The Missing Voice (Case Study B)>(1999), 밀레니엄 해에 시작하여 천 년 동안 이어질 영국 작가 젬 파이너(Jem Finer)의 현재진행형 사운드 작품 <롱플레이어(Longplayer)>(2000-) 등을 들 수 있다. 

아트엔젤은 많은 신진 작가들에게 그들이 그 때까지 시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크고 야심적이며 아트엔젤의 도움이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했을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영국 작가 마이클 랜디(Michael Landy)는 2001년 런던 시내 옥스포드 가에 자리한 쇼핑몰 C&A가 점포를 닫는 순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파괴하는 <브레이크 다운(Break Down)>을 아트엔젤 프로젝트로 실현했다. 옷, 책, 음반 등 상식적인 소유물부터 여권, 가족 사진 같은 사적 소유물과 타고 다니던 자동차까지, 2년에 걸쳐 이 세상에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물건들을 7천여점의 목록으로 정리한 후, 컨베이어 벨트와 공업용 분쇄기를 이용해 2주 동안 체계적으로 파괴시켰다. 자본주의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쇼핑몰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사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소유물을 파괴한 이 프로젝트는, 마이클 랜디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가장 비물질적인 결과물로 남았다. 같은 해에 실현된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의 <오그리브 전투(The Battle of Orgreave)>(*상단 이미지 참조)는, 1984년 요크셔 지역 광부 파업의 핵심 사건이었던 오그리브 항쟁을 마치 역사적 전투처럼 재현한 퍼포먼스 작품으로, 영국 영화감독 마이크 피기스(Michael Figgis)에 의해 영화로도 동시에 만들어 졌다. 이 대규모 프로젝트 역시 제레미 델러의 대표작이 되면서 이후 그가 터너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런던 남부 엘리펀트&캐슬(Elephant & Castle) 지역의 비어 있던 빈민층 아파트를 이용해 만들어진 로저 히온스(Roger Hiorns)의 2008년 작 <압류(Seizure)>는, 7만 5천 리터의 황산 구리를 아파트 내부에 부었다가 이 화학물이 실내의 벽과 천정, 바닥, 욕실 등의 표면을 짙은 파란 수정 결정체로 덮은 결과를 보여주는 프로젝트였다. 평범하지 않은 재료들을 도입하여 이들이 뜻하지 않은 변모를 거쳐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는 데 주목한 로저 히온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프로젝트도 단순한 화학물이 초라한 빈민층 아파트를 아름답게 반짝이는 설치 작품으로 변모시키는데 주목하였다. 이 작품은 이후 아트 카운슬의 컬렉션으로 구입되어 2013년 설치 전체가 요크셔 조각 공원으로 옮겨졌고, 임시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가 영구적인 작품으로 변화되기도 하는 아트엔젤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예로 남겨졌다.

 

필자: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 큐레이터 이숙경

이숙경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던 이숙경은 1996년 런던 시티대학 예술비평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내 다양한 예술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2007년 말 테이트리버풀로 옮겨 큐레이터이자 테이트 미술관의 아시아-태평양 소장품 구입위원회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에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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