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문화원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함께 마련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마당을 나온 암탉』의 황선미 작가가 참가하고 돌아왔습니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문학의 도시 노르위치(Norwich)에서 2015년 8월과 9월, 7주 동안 머물며 생활한 경험을 진솔하게 담아낸 황선미 작가의 레지던시 참가 후기를 소개합니다.
또 하나의 지도를 새기고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해 머물게 된 노르위치 작가 센터 에서 처음 만난 직원은 노르위치(Norwich)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노르위치는 작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내라는 뜻이었을 텐데 나로서는 감을 잡기 어려운 말이었다. 런던도 잘 모르는데 노르위치는 거기서 기차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시골 마을인 것이다. 런던과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 수도 있는 낯설고 두려운 곳이었다는 뜻이다.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작가 센터 직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노르위치는 아담하고 조용하고 길을 잃을 수도 없는 작은 도시가 분명했다. 마치 원형 도시가 아닐까 싶게 어디로 가도 익숙한 곳이 나온다. 그래서 머무는 동안 마음 편하게 산책하고 도서관에 다니고 여행도 할 수 있었다.
노르위치 작가 센터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나는 이 기회를 일종의 여행처럼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의 장기 투숙, 마음 한 자락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현지 주민들처럼 먹고 생활하고 문화를 느끼고 계절의 변화를 겪으며 내 인생의 한쪽이 채워지기를 바랐다. 나는 뭐든 늦게 익숙해지고 늦게 배우고 오래 겪어야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라 며칠 동안의 여행은 언제나 쓸쓸하기만 해서 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뭔가를 얻은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노르위치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의 한쪽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온다면 아침마다 운동하던 공원을 다시 거닐고, 어떤 골목을 찾아가고, 원고를 쓰던 도서관의 책상에도 앉아보고, 커피를 마시던 서점의 연두색 의자에 다시 한 번 앉아보고 싶어질 것 같다.
어느새 내 기억에 7주 동안의 선명한 지도 하나가 새겨진 것이다.
여행은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간이다. 이번 레지던시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원고 청탁 한 건을 무거운 숙제처럼 떠안고 온 것이다. 나는 원고를 먼저 쓰고 출판사를 고르는 편인데 이 원고는 계약서부터 작성하고 시작하게 돼서 부담이 매우 컸고 잘 해낼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어떻게 써야 할지 계획도 없었으니까. 믿는 것이라고는 몇 년 동안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켜 있는 에피소드의 파편들. 그것을 믿고 계약서부터 썼으니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셈이다.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소호 호텔에서 재영한인들과의 이벤트가 예정돼 있어서 그것을 먼저 진행하고 노르위치로 왔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집필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작업을 시작하니 스토리가 무리 없이 진행되고 쓰다가 지우는 일도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아마도 몇 년 동안 고민을 해온 이야기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껴보았고, 예정대로 마무리를 했다. 도서관에서 내게 인터넷을 쓸 수 있게 임시 패스를 주고, 마침 거기에 책상도 하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었다.
원고를 끝내고, 나는 숙제를 잘 마무리한 것을 스스로 축하하고자 혼자서 물어물어서 기차를 타고 크로머로 나가 바다를 실컷 보았고 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내 삶을 조용히 생각해 보기도 했다. 걸어서 기차역에 가고, 저렴한 비용으로 바다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노르위치의 큰 매력이다.
마침 친구가 런던으로 출장을 와서 4박 5일 동안 런던의 여러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영국의 다양한 음식을 먹어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원고만 쓰는 게 답답하기도 했고 노르위치를 좀 벗어나고 싶은 때라서 별 고민도 없이 그녀의 제안에 승낙했는데, 좋은 음식만 골라먹는 일도 고통이라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친구라서 새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온 출장이었기 때문에 온종일 온갖 음식을 찾아다니고 먹어봐야만 했던 것이다. 하루 만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전문가의 영역은 작가로서 겪어봐야 될 기회이기도 하여 끝까지 참아냈다. 돌아와서 일주일 동안 고생을 했어도 영국의 다양한 공간, 여러 부류의 사람들, 거기에 음식까지 경험하는 귀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얼마 뒤에는 노르웨이로의 여행 제안이 왔다. 원고도 마치지 못한 시점이었고, 레지던시 마지막 주에는 노르위치 초등학생들이 참석하는 행사, 런던에서의 포럼까지 예정돼 있어서 몹시 고민이 됐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의 여행... 곰곰이 따져보았다. 노르위치 작가 센터의 프로그램으로 왔다고 노르위치에만 있어야 하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거절해야 하나. 원고 핑계를 대고 편하게 그냥 지낼까. 나는 나 스스로를 또 시험해 보기로 했고 결과적으로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여행 떠나기 전에 집중하여 원고를 마무리했고, 통역에 필요한 포럼 원고를 작성해두었고, 초등학교 행사의 밑그림을 예상해두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나는 좋은 사람들을 사귀었고 놀라운 자연 경관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5일 만에 밤늦게 노르위치로 돌아왔을 때 Kenneth Mckee Plain 25번지가 나를 기다리는 집이 됐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나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을 지도가 또 하나 그렇게 새겨진 것이다.
10월 3일에 여러 나라의 작가와 번역가들이 참여하는 포럼을 끝으로 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번역가들이 중심인 포럼을 지켜보며 작가와 번역가의 관점이 꽤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3부에서 패널로 발언하면서 작가로서의 존재감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을 고민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나는 시인 소설가들과 구별되는 동화작가로 규정되기 일쑤였으나 그 자리에서는 한국의 작가라야 했고, 내가 5년 동안 진행하고 있는 작업에 더 분명한 책임의식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어디에선가 머문 시간은 나를 거기에 남겨두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노르위치에서의 7주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언젠가는 꼭 다시 방문하여 노르위치 곳곳에 남겨둔 나를 확인하고 싶다. 늘 친절했던 로렌과 존, 웃으면 친구처럼 느껴지던 티나에게 참으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