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룬 미르자는 빛, 소리, 전자파 등을 작품 안에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테크놀로지와 예술을 융합하는 작품 활동을 선보여온 아티스트로 얼마 전 한국에서의 첫 단독 전시 <회로와 시퀀스>(2015. 10~2016.2)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하룬 미르자에게 있어, 작품의 질료는 단순히 표현의 수단이 아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출발점과도 같다고 하는데요. 하룬 미르자가 다양한 미디어와 오브제를 통해 어떻게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지, 이채영 학예사가 ‘사운드 스케이프의 뒷면’에 이어 <회로와 시쿼스> 전시를 중심으로 알려드립니다.
하룬 미르자: 회로와 시퀀스-전기의 존재론과 이면 읽기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 작가전으로 열린 하룬 미르자의 《회로와 시퀀스》라는 제목은 그의 작품이 ‘전기(electricity)’라는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회로’는 “여러 개의 회로 소자를 서로 접속하여 구성한 전류가 흐르는 통로”, 영어로는 서킷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시퀀스’는 이러한 회로들의 연속과정, 즉 전류가 흐르는 과정들의 연속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룬 미르자의 작품은 제목 그대로 전류가 흐르는 통로 회로와 그 회로가 연결되어 이뤄진 전기가 흐르는 설치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전류가 만들어낸 스피커의 진동과 전류와 전류 사이의 마찰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를 전시한다.
현대예술 비평에 있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주제를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질료를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때로는 작가가 선택한 질료 자체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룬 미르자가 구축한 사운드 스케이프*가 그 자체로 시청각의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적 산물이자 동시에 그의 작품의 ‘메시지’를 만드는 “미디어”는 “전기”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미 작가는 ‘전기’를 자신의 작품을 이루는 재료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전기’ 자체를 시청각화 함으로써 작품자체의 미적, 의미론적 탐구 이면에 전기의 매커니즘이 현대예술의 존재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보여준다.
《회로와 시퀀스》 전시에서 〈LED 회로구성 9〉와 〈LED 회로구성 13〉은 ‘전기’ 회로의 연속으로 만들어지는 시퀀스 자체를 시각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LED 가 유리판에 각기 다른 색을 내며 전기의 파장을 보여주고 있어 마치 전기로 만든 추상회화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다. 이 작품들은 하룬의 작업 중 거의 유일하게 사운드가 없는 작품으로 “TV가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던 백남준의 말을 “전기가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TV와 영화의 콘텐츠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전기’라는 미디어 자체가 우리 삶의 환경을 변화시켰는지 보아야 한다고,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고 역설했던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가르침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진 속 작품 설명 (위부터)
- LED 회로 구성 9, 2014: 나무, 자물쇠,전선, LED, 동 테이프 / 58x59x7cm / hrm199 Ltd 소장 (LED Circuit Composition 9, 2014: Wood, lock, electrical wire, LEDs, cooper tape / 58x59x7cm / Courtesy hrm199 Ltd)
- LED 회로 구성 4, 2013: LED, 동 테이프, 전선, 마이크 케이블, 전원, 금속, 파운드 글라스 / 58x59x7cm / hrm199 Ltd, 리송 갤러리 소장 (LED Circuit Composition 4, 2013: LEDs, cooper tape, electrical wire, microphone cable, power supply, metal, found glass / 58x59x7cm / Courtesy hrm199 Ltd and Lisson Gallery)
- LED 회로 구성 11, 2015: 턴테이블 먼지 커버, LED, 전선, 동 테이프, 마이크 케이블 / 44x33.5x6cm / hrm199 Ltd 소장 (LED Circuit Composition 11, 2015: Turntable dustcover, LEDs, electrical wire, cooper tape, microphone cable / 44x33.5x6cm / Courtesy hrm199 Ltd)
- LED 회로 구성 13, 2015: 노랑색과 파랑색의 LED, 창틀, 판유리, 케이블, 전선 / 100x99x4cm / hrm199 Ltd, 리송 갤러리 소장 (LED Circuit Composition 13, 2015: Yellow and blue LEDs, window frame and pane, cable, electrical wire / 100x99x4cm / Courtesy hrm199 Ltd and Lisson Gallery)
- LED 회로 구성 14, 2015: 초록색과 빨간색의 LED, 창틀, 판유리, 케이블, 전선 / 47.5x29x1cm / hrm199 Ltd, 리송 갤러리 소장 (LED Circuit Composition 14, 2015: Green and red LEDs, window frame and pane, cable, electrical wire / 47.5x29x1cm / Courtesy hrm199 Ltd and Lisson Gallery)
- 태양 교향곡 태양_코르브 B, 2014: 태양전지판, 스피커, LED, 전자장치, 가변설치 / hrm199 Ltd, Lab'Bel 소장 (Solar Symphony Solar_Corb B, 2014: Photovoltaic panels, speakers, LEDs, electronics Dimensions variable / Courtesy hrm199 Ltd and Lisson Gallery)
〈태양 교향곡 태양_코르브 B〉에서 하룬 미르자는 ‘전기’를 만들어내는 태양 에너지 자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태양전지를 통해 흡수된 에너지로 전기를 만들고 그것이 빛과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 작품은 태양광을 실시간으로 전송 받아 바로 전기로 전환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작가는 태양전지를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가 건축한 빌라 사보아에서 열린 전시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전력의 양에 따라 빛이 만들어지는 색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태양전지의 빛의 양에 따라 LED의 색이 변하고 전류의 양에 따라 사운드가 바뀌는 <태양 교향곡 태양_코르브 B>는 자연의 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즉흥의 연주라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작곡가’라고 정의하는 하룬 미르자의 사운드는 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고장난 기계장치의 움직임 혹은 사물들간의 마찰과 충돌로 만들어지는 노이즈에서 시작된다. 그의 사운드에는 앞서 설명한 전기의 “회로와 시퀀스”를 드러내는 방식 이면에 작가가 구축한 다양한 문화적 레퍼런스로 구성된 사회적 의미 역시 존재한다.
하룬 미르자가 백남준의 첫 에든버러 회고전의 오프닝을 기념하여 제작한 <부름 The Calling>이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백남준이라는 작가, 종교적 사운드, 대중음악, 실험음악을 레퍼런스로 삼아 어떻게 사운드를 구축하고 제시하며 소통하는지 볼 수 있다. <부름>은 사실 <아단(Adhãn)>이라는 전작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아단’은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 이슬람 교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소리를 말하는 데 이 작품 속에는 ‘아단’을 들으며 종교적인 신성함에 감화 받아 회교도로 개종한 영국 팝 스타 캣 스티븐스(Cat Stevens)의 영상이 출연한다.
하룬 미르자는 <부름>에서 이 작품을 다시 스크린에 투사하고 이어 캣 스티븐스의 연주 동영상을 상영했다. 이 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화면은 실시간으로 전자파의 간섭을 받아 노이즈가 발생하는데 그 불규칙한 노이즈를 배경으로 무대 위에는 실험음악가 이옥경이 첼로를 즉흥으로 연주하고 있다. 관객들은 이 무대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관객석 한복판에서 들리는 또 다른 소리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 거기에는 13대의 라디오 주파수와 LED 빛이 만드는 사운드가 겹겹이 쌓인다. <부름>은 백남준 회고전의 오프닝에 걸맞게 백남준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경의를 표한다. 온갖 시청각의 장치로 가득한 전시장에 관객들이 참여해 만지고 조작하면서 작품을 변형시켰던, 음악을 전시하는 가히 현대예술의 혁명적 순간이었던 그 전시처럼, 하룬의 퍼포먼스는 사운드 설치와 비디오, 실시간의 연주가 어우러진 비결정적이고 즉흥적인 시청각의 경험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룬 미르자는 이미 존재하는 예술작품을 변주 혹은 전유할 때 그 작품에 대한 해석과 동시에 그것이 제시되는 장소와 시간의 사회적 조건과도 맥락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룬 미르자의 사운드 스케이프를 경험할 때 그것을 형성하는 전자 기술의 매커니즘의 풍경 이면 역시 보고 들어야 한다. 사운드가 연주되는 바로 그 장소와 시간과 새롭게 링크되는 의미들로 인해 하룬 미르자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새로운 예술의 패러다임으로 논의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주: '사운드 스케이프'는 캐나다의 작곡가이자 환경운동가인 R.M Schafer가 조합한 단어로 ‘Sound’와 ‘scape’의 복합어로써 청각을 통해 들리는 풍경, 즉 시각적인 경관과 대비되는 청각적 풍경으로써 소리경관을 의미한다.
하룬 미르자
런던 출신의 아티스트 하룬 미르자(Haroon Mirza)는 윈체스터 스쿨 오브 아트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디자인 비평과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스위스 팅겔리 미술관, 프랑스의 빌라 사보아, 아일랜드 근대 미술관, 영국의 헵워스 웨크필드, 뉴욕의 뉴 뮤지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프라다 재단,칼더 파운데이션, 뉴욕현대미술관,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등 세계의 주요 미술관, 갤러리, 비엔날레, 페스티벌에서 단체전 및 퍼포먼스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54회 베니스 비엔날레(2011)에서 주목할 만한 젊은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은사자상을 수상하였으며 영국의 노던 아트 프라이즈(2011), 일본 다이와 재단 예술상, 취리히 예술상(2013)을 수상했다.
필자: 이채영
미학을 공부했고 영상문화학 박사과정 중이다. 미디어아트공간 일주아트하우스에서 큐레이터 경력을 시작해서 백남준아트센터를 거쳐 2015년부터 경기도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 <비디오 다큐멘트>, <x_sound: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공동기획), <달의 변주곡>, <리듬풍경> 등 다수. 더불어 사운드, 퍼포먼스, 실험영화 등 확장된 현대 예술의 영역을 기획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