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영국문화원은 한국인 최초로 테이트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이숙경 박사의 영국문화계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영국 실험예술의 본산, 현대미술학회
영국 실험 예술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미술학회(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과 버킹엄 궁전을 잇는 큰 길에 자리하고 있다. 1946년에 설립된 현대미술학회는 동시대 예술과 문화를 폭넓게 아우르면서 영국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예술 기관 중 하나로 성장해 왔다.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고 예술적 욕구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던 1946년, 미술가 롤랜드 펜로즈(Roland Penrose)와 평론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자유롭고 전위적 예술을 논하는 모임을 준비하는 것에 뜻을 모았다. 당시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 중심으로 미적 담화들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다소 보수적이었다. 펜로즈 그리고 리드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대 미술가들과 저술가, 건축가, 과학자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모일 수 있는 대안 모임으로 현대미술학회를 시작했다.
정기적 모임을 가지는 형태로 시작된 현대미술학회는 1950년대에 들어 메이페어(Mayfair) 지역에 전시할 공간을 마련하였고, 1968년에는 현재의 위치로 이사하였다. 현대미술학회의 구성원들은 전위적인 현대미술 프로그램들을 선보였는데, 펜로즈 그리고 리드가 공동 기획했던 <현대미술 40년(40 Years of Modern Art)>전은 당시 영국에서 생소했던 입체주의 작품들을 다수 포함시킨 획기적인 전시였다. 젊은 미술가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윌리엄 턴불(William Turnbull) 등으로 구성되어, 커뮤니케이션, 대중문화, 상업주의 등을 심각하게 분석하여 팝 아트의 전신으로 불리우는 인디펜던트 그룹(Independent Group; IG)도 현대미술학회에서 1952년 첫 모임을 가졌다. 현대미술학회는 대중에게 처음으로 팝 아트, 옵 아트(Op Art) , 브루탈리즘(Brutalism) 등을 선보이는 등, 1950년대와 1960년대 영국 전위미술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시 및 강연을 통해 영국 전위미술 발전에 공헌한 현대미술학회
현대미술학회는 전시뿐 아니라 강연을 통해서 동시대의 미술 담화 틀을 마련했다.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Alfred Barr), 팝 아트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 미술사의 거장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미국 추상미술의 대표 이론가 마이어 샤피로(Meyer Shapiro) 등이 이미 1950년대에 현대미술학회에서 강연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현대미술학회의 관심이 언제나 동시대성과 현장성에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현대미술학회 프로그램들도 세계 전위미술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 한스 하아케(Hans Haacke) 등이 참여한 <사회로의 미술, 미술로의 사회: 7인의 독일 작가(Art into Society, Society into Art: Seven German Artists)>, 야니스 쿠넬리스(Janis Kounellis),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 타키스(Takis) 등이 포함된 <여덟 작가, 여덟 태도, 여덟 그리스인 (Eight Artists, Eight Attitudes, Eight Greeks)> 전시 등을 기획함으로써, 영국 국민들이 동시대의 유명 외국 작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퍼포먼스와 페미니즘에 바탕을 둔 헬렌 채드윅(Helen Chadwick), 메리 켈리(Mary Kelly),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등 이후 미술계의 거장이 된 작가들도 현대미술학회 전시를 통해서 영국 미술계에 소개된 바 있다.
현대미술학회의 위기와 새로운 출발
1990년대 들어 현대미술학회는 당시 성장하기 시작한 청년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발전을 맞았다. 1991년 현대미술학회는 공공 미술 기관 중 최초로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개인전을 진행함으로써 창립 당시 실험성과 전위적인 방향성이 영국 미술계로 복귀하였음을 반증했다. 현대미술이 대중적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기관의 전위정신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영화 및 음악 프로그램을 통한 활동은 기관의 진보적인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이어나갔다.
2000년대 후반은 현대미술학회에 있어 최대의 위기가 닥친 시기였다. 2005년 저널리스트 출신의 예술 감독이 부임하면서 미술 분야 전문가가 관장직을 맡는 전통이 중단되었는데, 이와 맞물려서 기관 전시 프로그램들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기관의 방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서 전시 무료 입장제를 실시하였지만, 이것은 기존의 멤버십 기반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이것으로 인한 수입 감소, 세계적인 경제 위기, 공공 기금 지원 삭감 등 기관은 폐쇄를 고려해야할 정도의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현대미술학회는 잉글랜드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 덕분에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2011년에 드디어 새 관장을 맞이했다. 그리고, 새로운 예술에 활동의 장을 제공하겠다는 창립할 당시의 목적을 다시 되새기기 시작했다. 물론 현재의 미술 및 문화계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상황과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하였고, 전위적인 예술 정신 또한 그 위상이 높아졌지만, 언제나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시각을 유지하려는 현대미술학회의 자세는, 예술계 발전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필자: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 큐레이터 이숙경
이숙경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던 이숙경은 1996년 런던 시티대학 예술비평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내 다양한 예술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2007년 말 테이트리버풀로 옮겨 큐레이터이자 테이트 미술관의 아시아-태평양 소장품 구입위원회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에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