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 하나인 영국문화원 주관 에든버러 쇼케이스가 어느덧 2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모습들이 살아 숨 쉬는 페스티벌의 현장을 두산아트센터 김요안 프로듀서의 이야기로 만나보세요.
에든버러 극장 안으로의 여행: 2008년에서 2017년까지 변화와 발전
2008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대한 한국 공연계의 러시가 일어나던 그때, 나는 아직은 다소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 속에 두산아트센터 예술감독님, 동료 PD와 함께 출장으로 에든버러를 처음 방문했다. 비 내리는 늦은 밤 에든버러에 도착해 플레전스 거리를 지나며 숙소로 향해 가던 차 안에서 바라본 첫날의 풍경과 인상은 지금도 선명하다. 하루에 10여 편의 공연을 밥 먹는 시간을 아껴가며 챙겨 보던 그 당시, 출장 기간 후반까지 내내 내렸던 비는 8월 임에도 꼭 초겨울에 맞는 비 같았다.
2017년은 영국문화원이 주관하는 에든버러 쇼케이스(Edinburgh Showcase) 프로그램이 시작한 지 20주년을 맞는 해이자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이 70주년을 맞는 특별한 해다. 나는 에든버러 쇼케이스 공연 관람과 크리에이티브 스코틀랜드(Creative Scotland, 스코틀랜드의 예술위원회 유사 기관)의 모멘텀(Momentum) 행사 참석을 위해 에든버러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에든버러 출장 중 마지막 출장으로부터는 4년, 첫 출장인 2008년 방문으로부터는 벌써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전에는 9월 공연 준비로 주로 8월 초·중순에만 방문했던 것을 이번에는 에든버러 쇼케이스와 모멘텀 기간에 맞춰 8월 말 방문이다. 늘 이곳에 오면 처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날씨. 다행히도 이번 여행의 도착 첫날의 날씨는 그동안의 첫날 중 가장 좋다.
에든버러 쇼케이스는 영국 문화원의 연극 무용 파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영국 공연예술 전문가, 국제 프로그래머들이 함께 위원회에서 작품을 선정한다. 이는 매 홀수년 시행하는 영국 신작 공연의 글로벌 쇼케이스로 해외 공연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다. 30여 개의 선정작들은 일상적인 개인의 삶, 사랑 이야기에서 글로벌 정치적 이슈까지 아울러 다양한 동시대 이슈를 혁신적인 형식으로 선보인다.
올해에는 공연 외에도 피치 세션, 트레이드 페어까지 폭넓게 교류와 소통의 장을 확대하려 노력했고, 공연 별로 다양한 오픈 전문 워크숍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30여 선정팀 중 절반 이상을 에든버러 쇼케이스에 새로 참여하는 극단들의 작업으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2008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프린지를 중심으로 수천 개가 넘는 공연의 양과 다양성,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면, 이번 여행에서의 주된 관심사는 에든버러 쇼케이스 작품 등을 중심으로 동시대 사회에 대한 좀 더 깊은 탐구, 새로운 예술적 시각과 접근을 보여주는 작가와 작품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 바람 속에 올해 에든버러 여행 중 만나게 된 15편의 작품들,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시각과 예술적 전망은 약화된 사회적 신뢰와 그에 대한 반발로 더 강하고 깊은 감정적 요구와 말을 담아낸 공연들이었다.
국제적인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공연 예술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란성 쌍둥이 페스티벌인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은 70주년의 연륜만큼이나 견고하고 전략적으로 조직되어있다. 3398개의 팀이 300여 개 공연장에서 5만 회가 넘는 공연을 올리며 다양성의 기록을 올해도 갱신하는 동시에, 이런 양적 규모의 팽창과 세월은 기존 중심 극장의 역할을 분화시키며 또 다른 대안과 코어를 찾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 더욱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들은 Summerhall과 외곽 바닷가 Leith 지역의 Volcano 극장 등에서 올려지고 있었다.
Strong Words
사회적 신뢰가 약화된 세계는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혹독하다. 매서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내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자 그들과 연대하는 예술가일 것이다. 영국 및 유럽 사회의 우경화의 큰 흐름 속에 이민자, 성 소수자, 경제적 약자, 위태로운 젊은 세대의 문제는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러 공연에서 무대라는 수면 위로 올라와 뜨겁게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 공연들은 고전의 완전히 새로운 재창작으로, 때로는 날 것 그대로의 증언으로, 혹은 기존의 공연 문법과 기술을 새롭게 다시 창작해내며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Oresteia)를 새롭게 재창작한 Zinnie Harris의 <Oresteia: This Restless House>는 그런 고전의 재창작이란 관점에서 대단히 과감한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공연은 장장 4시간 30분 동안 3부작으로 이어진다. 두 번의 인터미션에 관객들이 자리를 뜰만도 한데 강렬하고 새로운 이 공연은 관객들을 압도하여 끝까지 그 긴 시간을 버티도록 이끄는 힘이 있었다. 나는 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포럼 등으로 이 긴 공연을 과연 ‘클리어’ 할 수 있을지 자신 없는 상태에서 객석에 앉았지만, 4시간 30분 후 객석에서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올해 에든버러의 여왕으로 Zinnie Harris를 꼽기도 하는데, 그럴 것이 그녀는 이번 에든버러 페스티벌 기간에만 <This Restless House>를 포함해서 3편의 작품을 올리며, 영국에서 가장 핫한 작가 중의 한 명임을 입증했다. 특히 <This Restless House>에서는 Clytemnestra와 Electra 등 여성 캐릭터의 묘사에서 과거 다른 각색에서 보기 힘든 매우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This Restless House>를 공연한 Citizens Theatre는 도미닉 힐(Dominic Hill)이 이끄는 영국의 대표적 극단으로,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가 쓴 원작을 바탕으로 언어, 세트, 무대 배경 등을 현대 관객의 요구에 맞추고, 누드, 폭력, 살인 등의 표현에 주저함 없는 과감한 연출을 통해 한 가족의 고통을 충격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했다. 또한, 작곡가 겸 사운드 디자이너 Nikola Kodjabashia는 아방가르드하면서도 깊이 정서를 끌어내는 뛰어난 음악으로 이 막장의 3부작을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일조했다.
<This Restless House>가 공연된 리슘 극장의 로비에는 2017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날 프로그래밍의 컨셉 중 하나인 ‘Strong Words’ 가 선명한 노란색 바탕 위 거칠게 필기체로 쓰인 포스터로 붙어 있었다. 4시간 반 동안 강렬한 감정의 언어들은 해머처럼, 메스처럼 관객들의 현실로 강렬하고 깊게 파고들어 갔다.
런던의 혁신적인 극장 중 하나로 재능 있고 젊은 작가들의 터전이 되고 있는 Soho Theatre는 <Fleabag>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강렬한 독백과 다양한 신체적 묘사가 잘 결합한 여성 1인극으로, 절친의 죽음을 대하는 성적 중독 증세를 가진 여주인공의 우정과 사랑,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20세기 초 브리짓 존스로 표현되는 영국 여성이 새로운 세기의 여성에 대한 낙관주의와 남성들의 협조를 낭만적으로 기대했다면 이 작품은 21세기의 첫 17년을 살아간 여성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현 고도 자본주의 사회 속의 위태로운 여성의 삶을 직시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의 적나라하고 두려움 없는 고백을 통해 힘겨운 동시대 여성들의 성과 정체성, 자존감을 위한 투쟁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한 것인지를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21세기에 대한 우울한 절망은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각 영역의 맨 뒷줄에 있는 약자들, 혹은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넘실대고 있었고, 특히 고속으로 달려가는 설국열차의 맨 뒤 칸조차 아직 올라타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큰 그림자를 지우고 있었다. 영국의 삼포 세대가 절망의 디스토피아 위에 유토피아를 꿈꾸는 풍자를 담아낸 <Plan B for Utopia>에서, 안무 연출가이자 출연자인 Joan Cleville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꿈이 얼마나 위태롭고 아련한 것인지를 관객과 깊이 교감하며 그려냈다. 이 작품은 복합 댄스, 스토리텔링, 연극 등 다양한 형식적 융합 위에 유토피아의 정의를 관객과 함께 탐색해 간다.
반면 종말론으로 관객을 압도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시대를 예언하는 작품으로 Kieran Hurley의 <Heads up>이 있었다. 연기자, 작가, 연출가인 Kieran Hurley는 다양한 예술적 형식을 아주 미니멀한 방식으로 교차시키고 직조하는데 특별한 자질을 보이는 데 특히 이 작품에서 Kieran은 본인 혼자서 연기는 물론 복잡한 기술 오퍼레이팅을 해낸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대사는 시적이며, 음악, 음향 등의 기술적인 요소를 연기 중에 직접 오퍼레이팅하며 예언자처럼 혹은 디제이처럼 관객을 이끄는 퍼포먼스는 새로웠다. <Heads up>의 종말론적 미래 서사 속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탐구와 날카롭고 정치적인 풍자의 세계관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저항 문화는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종말론의 형태로 무대 위에서 이미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회의 약자이면서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가장 취약한 이민자, 여성 성노동자의 목소리는 <Flight>(에딘버러 인터내셔날 페스티벌 작품), <See Me Now> 같은 작품을 통해서도 무대 위 전면으로 나서고 있었다. Vox Motus가 선보인 <Flight>는 두 명의 이슬람 소년이 카불에서 테헤란, 이스탄불, 아테네, 로마,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향하는 순례와 같은 고난의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원작 소설을 각색해 대형 원통 세트에 장착된 정교한 디오라마를 회전시키며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새’로 비유되는 타인을 배척하는 공격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소년들의 여정은 정교한 그래픽 노블 같이 만들어진 각각의 장면들 사이로 아날로그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전쟁과 이주, 그리고 그 끝에 있을 수도 있는 작은 희망에 대한 마법 같은 스토리텔링이었다.
이에 반해 <See Me Now>에서 극단 Look Left Look Right는 동시대 실제 이야기에 기반을 둔 극적 소재를 다루며, 실제 인물들을 출연시키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협업으로 작품을 창작했다. <See Me Now>에서 실제 11명의 남성/여성/트렌스젠더 출신의 Sex worker들은 삶과 일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연극 만들기 방식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며 관객에게 깊은 교감을 주었다.
김요안 프로듀서
오리콤, 악어컴퍼니,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했으며, 두산아트센터에서는 2007년 개관부터 프로듀서로서 일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 지원과 신작 개발, 국제교류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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